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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 컴퓨터와 PC

인터넷 PC며, 무슨 PC며, 요즘들어서 주변에 널린 용어중의 하나에 PC라는 단어를 끼워 넣을 수 있을 것 겉다. 이 단어는 Personal Computer, 즉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컴퓨터라는 '본래 단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단어와 1:1로 연결되는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 난관에 처한다.

우선, 퍼스널 컴퓨터라고 하면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 흔히들 여기에 대해서는 '개인용 컴퓨터'라고 스스럼없이 대답을 한다. 또한 PC가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에도 역시 같은 대답을 한다. 과연 그러한 대답이 옳은 것인가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Altair

앞서 컴퓨터에 대한 분류를 할 때 '개인용 컴퓨터'라는 것을 언급했다. 그리고 이것은 대개 PC라고 불렸다(여기에, 필자는 과거시제를 사용했다. 이 이유는 차후에 언급하자). 사실 '개인용 컴퓨터'라는 것은 이전의 역사연표 강좌에서도 언급되었던 알테어 시스템(MITS, 1975)를 그 시초로 하고 있다. 8080 프로세서와 259Byte의 메모리를 내장하고 있었던 이 컴퓨터는 지금의 컴퓨터와는 좀 개념이 다르다. 모니터 대신에 겉에 다수의 LED가 붙어있었고, 만화등에서 흔히 보는, 불이 껌뻑껌뻑대는 그러한 대단히 고전적인 계산기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또한 마치 예전에 많이 유행하던 4석라디오, 6석라디오 식의 전자부품 키트 형식으로 판매되었고, 사용자들은 각 부품을 직접 납땜하고 조립하여서 하나의 컴퓨터를 구성하는 제품이었다. 그만큼 구조가 간단하다는 이야기도 된다.

 

이 시스템부터 시작한 개인용 컴퓨터는 지속적으로 발전하였으며, IBM이 5100 시리즈로 시장에 진입한 이후 이 시리즈로 PC의 계보는 이어진다. 이 때 IBM이 'IBM PC'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특별한 이름을 정한 것도 아니고, 당당하게 'IBM PC'라는 것을 자사의 제품명으로 정해버린 것이다.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아래에서도 다시 언급하겠지만, IBM은 이후 8088프로세서 출시 후 'IBM PC XT'라는 이름으로 자사의 PC를 발표하고, 매킨토시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바이오스를 제외한 나머지 아키텍쳐를 공개한다. 이러한 과정은 곧 IBM PC 호환제품들의 양산이 이루어지게 되는 토양을 제공하였다. 이 때 피닉스(Pheonix)사가 등장한다.

피닉스사는 크린룸(Clean Room)이라는 접근기법을 사용해서 IBM의 바이오스를 모든 특허권이나 라이센스의 문제를 피해가면서 그 기능을 그대로 복제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미 아키텍쳐의 공개로 다져진 IBM PC 호환기종의 시장은 꽃을 피운다. 호환기종의 절대적 수량 우세로 인해서 개인용 컴퓨터라는 분야는 거의 IBM PC 호환기종들이(IBM PC가 평정했다는 것이 아니 다.) 평정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사용자들은 PC라는 것을 '개인용 컴퓨터'라는 일반명사가 아닌 'IBM 호환기종'이라는 고유명사로 인지해버리게 된다.

 


iMac DV. 개인용 컴퓨터이기는 하지만 PC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c) copyright by
Apple

상황이 이렇게 변했으니만큼 PC라는 것을 새로이 정의해 보아야 한다는 것은 대단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분명, '퍼스널 컴퓨터'라는 것은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소형 시스템을 지칭하고 있다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지만, PC라는 것을 동일하게 해석한다는 데에는 사회적인 인식의 문제가 발생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많은 사용자들은 PC라는 것을 범용적인 명사가 아닌 IBM이 만들어낸 8088 계열의 프로세서를 사용하는 시스템이라고 인지하고 있다. 이것은 같은 '퍼스널 컴퓨터' 계열인 매킨토시와의 비교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PC활용지나 PC 정보지, 또는 그와 관련된 모든 미디어들이 다루는 것은 IBM 호환 시스템이지, 매킨토시 계열이 아니다. 다룬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뉴스거리의 제공등에 지나지 않는다.

 

 매킨토시는 초기에 폐쇄적인 아키텍쳐를 그대로 고수함으로써 시장 점유율에서 IBM에 완패하였다. 그리고 사용자들의 인식에서 IBM에 밀리게 되었고, 이는 곧 메이저 시장에서 사라진다는, PC라는 이름을 완전히 박탈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후 매 킨토시가 완전히 자리를 잡고 시스템의 한 트렌드로써 완전히 정착된 이후에도 수복되지 않았고, 지금도 매킨토시는 '맥'이라는 별도의 호칭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인식되고 있는 'PC'라는 것은 분명히 'IBM 호환 시스템' 혹은 'x86 호환 시스템'을 지칭하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앞으로 필자가 다룰 PC의 정의가 되겠다.


IBM PC와, 그리고 그 이후

IBM PC의 완성


IBM의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 5100
(c) copyright by
IBM

1980년대 말, IBM은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저가격 컴퓨터 시장에 전력을 다하기로 계획을 잡는다. 그리고 바로 플로리다의 보카 랜턴(Boca Ranton, Florida)에 기초 시스템 부문이라는 별도의 사업부를 창설한다. 이 사업부는 기존의 IBM사의 연구소와는 큰 차이를 보였다. 뉴욕에 있는 IBM의 본사나 다른 별도의 사업부서와 지리적으로도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으며, 수행하는 사업 역시 철저히 독립적으로 수행되었다. 이 작은 부서는 돈(Don Estridge)의 지휘를 받는 12명의 엔지니어와 디자이너(여기서 말하는 디자이너라는 것은 시스템의 외부 디자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회로 로직을 구성하는 디자이너를 지칭한다)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기에 투입된 인원은 거의가 System/23 DataMaster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연구원들이었으며, 바로 이 System/23 DataMaster가 5100 시리즈와 '진짜 PC'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 주는 시스템이었다.

 


최초의 'IBM PC'
(c) copyright by
IBM 

어찌되었던, 이 기초시스템 사업부에서 드디어 최초의 'IBM PC'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물론, IBM사가 말하는 PC의 시작은 75년에 발표된 5100 시리즈이지만, 사람들이 인식하는 PC, 즉 x86 호환 시스템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이 때 발표된 시스템이었다. 대다수의 연구원이 System/23 DataMaster의 제작 팀이었기에, 최초의 PC는 이 시스템과 상당부분 비슷하였다.

 

DataMaster는 최대 64KB까지의 데이터 억세스가 가능하고, 내/외부 버스가 모두 8bit로 이루어져 있었다. 최초로 발표된 IBM PC는 인텔의 8088 프로세서를 사용하였는데, 이 프로세서는 최대 1MB까지의 데이터 억세스가 가능하였고 내부적으로 16bit의 버스를 사용한 연산을 하였지만, 외부적으로는 8bit의 데이터 버스를 가지고 있었다. 외부 버스가 8085와 마찬가지로 8bit 였기에 DataMaster와에 사용되었던 디자인에서 약간의 변경을 가하여 바로 IBM PC에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대단히 용이하다는 특징을 가졌다. 이것이 최초로 적용되었던 '하위호환성'을 고려한 디자인이다. 지금도 이러한 하위호환성에 대한 고려가 되어 있는 시스템을 많이 발견하는데, 이러한 '하위 인터페이스(혹은 버스)를 사용한 호환성 유지'는 물론 성능에서의 손실을 수반하기는 하지만 그 이전까지의 사용자들 및 하드웨어 디자이너들에게 유연성을 제공하며, 또한 보다 저렴하다는 경제적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종종 선택되는 방법이다.

 

돈 에스트리지과 그가 이끄는 디자인 팀은 이러한 장점을 활용하여 새로운 시스템에 적용될 각종 스펙을 결정해나갔다. System/23 DataMaster가 가지고 있던 사양들을 차용해 오면서, 이 팀은 IBM PC의 디자인에 영향을 미칠 시장의 소비자들의 요구를 분석했다. 동시에 기존에 표준으로 자리잡았던 것들에서 어떤것을 변경하고 어떤것을 그대로 유지시킬 것인지를 결정하고 이를 토대로 시장의 요구에 맞으면서도 기존 시스템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디자인의 변경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도록 하였다.

 


Microsoft가 IBM에 납품했던 OS인 PC-DOS
(c) copyright by
Microsoft

또한 이 기초시스템 사업부는 기존의 다른 IBM 계열사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치권을 승인받았기 때문에 IBM 내부의 인적 물적 자원을 지나치게 소모하게 되는 관료적인 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각 컴포넌트를 직접 외부 업체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IBM의 PC는 구상을 시작한 후 단 1년만에 제품이 시장에 출시되게 된다. 이 때 IBM은 Microsoft라는 작은 기업(당시로서는 영세업체였다)에 PC용 소프트웨어와 운영체제의 제작을 의뢰하게 되며, 이것이 바로 지금의 거대기업 Microsoft의 시작이다.

사실, 당시 IBM은 운영체제와 어플리케이션의 제작을 Microsoft가 아니라 Digital Research사에 의뢰했다. Digital Research는 당시 가장 많이 사용되던 OS인 CP/M을 제작하던 회사였다. 하지만 이 회사는 IBM과의 계약을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IBM이 원하는 비공개 계약을 거절하였다.

이것은 마이크로소프트로 하여금 Digital Research사의 공석에 올라설 수 있게 하는 기회를 만들었으며, 현재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기업을 만든 일대 사건으로 기록된다. 마이크로소프트를 포함한, IBM의 외주 전략 은 다종다양한 업체들이 IBM 호환 시스템에 사용할 수 있는 하드웨어를 직접 제작할 수 있는 여견을 제공함으로써 사후시장(Aftermarket)을 표면으로 끌어올리고 시스템의 발전을 지원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실제로 그러한 전략은 효과를 보았다.

이러한 산고 끝에 1981년 8월 12일 IBM은 컴퓨터 업계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새로운 표준인 IBM PC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때 이후로 수많은 IBM 호환 시스템들이 생겨나고 팔리기 시작했으며, PC는 수많은 주변기기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러한 거대한 물결은 소프트웨어에서도 다르지 않았으며 당시 시장의 그 어떤 시스템보다도 많은 소프트웨어를 보유함으로써 IBM PC라는 거대한 플랫폼을 생성하였다.

 

IBM PC 이후, 그리고 20년

i8088프로세서의 다이
펜티엄 III 프로세서의 다이
8088 프로세서의 다이(上)와 Pentium III 프로세서의 다이(下)
(c) copyright by Intel

올해 8월이면 IBM PC가 세상에 등장한지 20년이 된다. 이 기간동안 IBM 호환기종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어왔다. 초기의 8088 프로세서는 단지 4.77MHz로 동작했지만, 현재의 인텔과 AMD는 1GHz의 프로세서 전쟁을 치루고 있다. 지금의 프로세서는 최초의 프로세서에 비해 성능면에서 보자면(단지 클럭 주파수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연산성능에서 보았을 경우) 약 1만배의 성능을 가지고 있으며, 저장매체의 경우 IBM PC XT가 160KB의 플로피디스크 드라이브에 데이터를 저장했던 것에 반해, 현재의 시스템들은 20~30GB의 하드디스크를 가지고 있으며, 이제 일반 사용자용 하드디스크에도 70GB대의 제품이 등장하고 있다.

 

Gorden Moore
인텔의 창업자 3인방중의 한명인 고든 무어
(c) copyright by Intel

컴퓨터 업계의 이러한 변화에서 가장 큰 의미를 가지는 법칙을 이야기하자면 우선 무어의 법칙을 들 수 있다. 1965년 고든 무어(Gorden Moore)는 컴퓨터 메모리 분야의 트렌드에 대한 연설을 준비하던 중 흥미로운 결과를 발견하였다. 데이터를 가지고 그래프를 그려나가던 중 그는 대단히 놀라운 경향을 보게 된 것이다.

 

 각각의 새로운 프로세서는 그 이전 세대의 제품에 비해서 대략 두배의 용량을 가지고 있었고, 이렇게 새로운 프로세서가 출현하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적 간격은 약 18개월에서 24개월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만약 이러한 경향이 지속된다면 컴퓨터의 능력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아래의 그래프는 프로세서의 발표연도와 그 프로세서가 가지는 트랜지스터의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 1977년 발표된 8088은 2만 9천개의 트랜지스터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1999년의 펜티엄 III에 와서는 9500만개로 12년만에 거의 330배의 발전을 보이고 있다.

 

지금, 무어의 이러한 관찰 결과는 무어의 법칙(Moore's Law)로 불리고 있으며, 그 당시 이후로 지금까지도 거의 정확하게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무어의 법칙은 단지 메모리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디스크 저장장치의 용량이라던가, 각각의 프로세서나 반도체에 사용되는 트랜지스터의 집적도, 그리고 속도 이 모든 것들이 무어의 법칙에 따르는 예를 보여준다. 이러한 '공통성'은 곧 무어의 법칙이 컴퓨터 분야에 있어서는 최우선의, 절대적인 법칙으로 자리잡게 하고 있다.

 


무어의 법칙을 보여주고 있는 그래프.


트랜지스터의 수치는 로그 스케일로 되어 있으며, 프로세서들의 위치는 거의 직선을 이룬다.
이는 트랜지스터 수의 증가가 기하급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

 

이러한, 용량이나 속도 등 외에 당시와 비교해서 변한 것이 있다면 바로 표준을 누가 규정하는가이다. 초기의 IBM은 단지 IBM 호환 시스템을 만드는 것 뿐만이 아니라 IBM PC라는 플랫폼의 표준을 규정했다. 하지만 이후 많은 업체들이 IBM 호환 PC를 만들면서 표준 규정에 대한 주도권은 IBM으로부터 다른 기업들로 넘어가게 된다.

오늘날 PC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표준을 정하는 것은 거의 '윈텔 연합'이라고 불리는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에 의존하고 있다.(사실 의존하고 있다라기 보다는 이들이 정하는 표준을 다른 업체들이 따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최근 들어서는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의 강력한 '윈텔 진영'은 PC의 진화 행보를 거의 모두 떠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CI나 AGP, ATX, NLX 등의 하드웨어적 규격은 모두 인텔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프로세서 부분 역시 그러하였다. 최근들어서 AMI의 개입이 거세지기는 했지만 아직 점유율에서 인텔을 따라가지는 못하며, 이 때문에 업계에 미칠 수 있는 순수한 '파워'는 인텔에 밀릴 수밖에 없 다. 한편, 마이크로소프트는 현재 다수의 회사로 분할될 위기에 처하기는 했어도 역시 운영체제와 사무용 어플리케이션 등에서는 절대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영향력은 인텔에 뒤지지 않는다.

 


대표적인 BIOS 제조사인 AMI의 로고
(c) copyright by
AMI

오늘날, 수많은 PC 호환기종 제조업체가 난립하고 있으며, 이들이 만들어내는 시스템은 완전히 PC와 호환된다. 또한 수천가지의 PC 주변기기 제조업체들은 이들 시스템에 사용할 수 있는 다종다양한 주변기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PC 호환 시스템은 분명 성공한 시스템이다. 하드웨어를 쉽게 조립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물론 그렇거니와 이 외에도 사용되는 운영체제를 IBM이 직접 만들지 않고 마이크로소프트사에 외주를 주어서 제작했다는 것 역시 성공의 요인중의 하나이다. 시스템에 사용되는 가장 중요한 소프트웨어인 바이오스는 이미 AMI, 피닉스, 어워드 등의 서드 파티(Third party)업체들이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은 많은 제조업체들이 단지 OS와 바이오스를 라이센스 받아서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자신들만의 PC 호환 시스템을 제조할 수 있는 기틀을 다져주었다.

이 때 사용된 DOS는 그 인터페이스가 당시 사용되던 CP/M 및 UNIX와 상당부분 유사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기본적은 컨셉을 그대로 채용하였기 때문인데, 이것은 기존의 많은 소프트웨어들과의 유사성을 만들어줌으로써 기존 사용자들이 보 다 쉽게 PC에 적응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후 DOS가 큰 성공을 거두고, Windows로 그 성공이 이어져가자 프로그래머들이 PC용 소프트웨어를 제작할 이유는 다분히 많아졌으며, 따라서 이후는 윈도우즈의 독자적인 행보를 하게 된다.

 

왜 매킨토시는 그러지 못하였는가

Macg4
Apple사의 PowerMac G4
(c) copyright by Apple

퍼스널 컴퓨터의 발표 초기, 매킨토시 역시 퍼스널 컴퓨터 시장의 강력한 경쟁자였다. 하지만 이들은 '호환 시스템'을 만들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것은 IBM이 호환 시스템 시장이라는 구도를 만들면서 IBM PC 호환기종이 퍼스널 컴퓨터 시장을 장악하게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는 IBM PC가 시장에서 밀려나는 상황을 초래했던 것을 교훈삼아, 자신들의 시스템의 아키텍쳐는 공개하지 않았다.

 

물론 IBM 역시 바이오스는 공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피닉스사가 이를 재구성하는데 성공하여 호환 PC 시장이 활성화 되는데, 매킨토시의 경우는 바이오스와 운영체제가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운영체제를 외주로 한 것이 아니라 자사가 직접 제작하였기에 복제가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어떠한 기업이 매킨토시 호환기종을 만들고자 한다면 바이오스와 매킨토시의 OS인 System을 라이선스받아야 하였는데, 애플사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맥클론 시스템 중 하나인 Daystar사의 밀레니엄. 그러나 이 역시 라이센스 중단으로 단종사태를 맞는다.
(c) copyright by About

물론, 예외는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애플사는 파워컴퓨팅사의 서드파티 업체에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를 허락한 적이 있었고, 이 잠시동안 '맥 클론'이라는 새로운 제품들이 시장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애플사는 매킨토시 시스템의 공급원은 오로지 하나여만 한다는, 즉 애플사만이 매킨토시를 공급해야 한다는 정책에 따라서 모든 라이선스를 취소한다. 그리고 그 이후 맥 클론은 시장에 등장하지 못했다.

이것은 나중에 보다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애플이 PC의 시장점유율을 따라잡기 위한 잠시간의 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몇몇 업체의 맥 클론 생산으로는 도저히 시장점유율을 따라잡는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으므로, 클론을 사용해서 수로 대적하는, 어찌보면 메이저 업체의 위상을 내줄 수 있는(IBM이 그러했으니까) 위험성이 수반되는 전략을 배제하고, 매킨토시를 보다 특화시킨다는 쪽으로 전략을 바꾼 것이다.

맥 클론을 시장에 투입하려 했던 시기는 이미 IBM의 PC와 그를 계승하는 시스템들로 인해서 확고한 표준이 정해진 상태였고, IBM과 동등한 전력으로 맞서다가는 '규모의 경제'라는 큰 걸림돌 때문에 IBM에 밀릴 것이 확실했다는 것도 그 이유가 되겠다. 오늘날의 PC들을 보면 대단히 저렴한 가격에 맥보다 비교적 높은 성능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수요량에 따른 규모의 경제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꿔말하면, 애플의 가격이 PC에 비하면 대단히 높은 수준에 있으며, 이러한 차이는 당분간 극복되기 어려울 것이며, PC가 가지고 있는 시장을 매킨토시가 대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출처 : Tong - NEEDLE MAN님의 Computing Battle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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